“기억은 낡지 않는다, 글로 다시 살아나기 전까지는.”
1. 항구의 얼굴, 기억이 머무는 장소
군산 근대문학관에 들어섰을 때, 나는 단순히 문학작품이나 작가의 흔적을 마주한 것이 아니었다. 이 공간에는 군산이라는 도시가 품어온 항구의 정서, 그리고 시대의 단면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낡은 건물의 외벽, 서늘한 내부의 공기, 한 장씩 넘겨진 시집들 사이로 도시의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항구는 언제나 배와 사람, 이야기의 집결지였다. 군산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곡물 수탈의 통로로, 해방 이후에는 고단한 삶과 엇갈린 희망의 무대로 기능했던 이 도시는, 무명의 문학인들에게 있어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현실의 출구였다. 그들은 군산의 골목과 부두, 기차역과 선술집을 무대로 시와 소설을 써 내려갔고, 그 속에는 당대의 감정과 풍경이 농축되어 있었다.
문학관 안에는 오래된 필사본과 시집, 잡지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누렇게 바랜 표지, 손때 묻은 종이, 정리되지 않은 문장들 속에는 단순한 작품이 아니라 도시의 속마음이 눌어붙어 있었다. 나는 한동안 조용히 글들을 읽으며, 문학관이 전시장이 아니라 감정의 기록보관소처럼 느껴졌다. 그 속에서 문학은 창작물이 아니라 생존의 기록이자, 기억을 지키는 언어였다.
군산 근대문학관은 결국, 항구도시의 외형이 아니라 그 안에서 살아 숨 쉬던 사람들의 목소리와 감정을 고스란히 담은 공간이었다. 이곳은 도시의 과거를 읽는 동시에,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조용한 문학적 항구였다.
2. 도시를 걷는 문장의 리듬
군산 근대문학관은 단지 내부 전시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문학관을 나와 주변 거리를 걷는 순간, 문학은 다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다. 옛 은행 건물, 적산가옥, 해망굴과 구세군 본영. 이 거리 곳곳은 그 자체로 시와 산문의 무대가 되어온 장소들이다. 실제로 1930년대 군산에서 활동했던 작가 김윤식이나 이근영 같은 인물은 자신의 단편소설 속에 이 도시의 풍경을 섬세하게 녹여냈다. 그들이 남긴 문장은 다 읽고 나면 머리에 남는 이야기가 아니라, 몸으로 겪어낸 공간의 리듬으로 남는다. 지금도 걷는 이 거리는 무수한 감정이 쌓인 종이처럼, 누군가의 시선에 따라 새로운 문장이 될 준비가 된 풍경이다.
3. 항구 문학, 도시의 어둠과 빛을 담다
항구라는 공간은 그 자체로 이중적이다. 환영과 이별, 출발과 귀환, 풍요와 결핍이 공존하는 장소다. 군산 역시 그러했다. 쌀 수탈의 중심이었고, 수많은 노동자들이 이주해 고단한 삶을 꾸렸던 도시. 그래서 군산의 문학은 마냥 낭만적이지만은 않다. 근대문학 속 군산은 거칠고, 거칠기 때문에 솔직하고 진하다. 군산에서 태어난 시들은 대부분 도시의 이면을 조용히, 그러나 정직하게 기록하고 있다. 한 시인은 군산항을 ‘검은 연기 속에서도 잠들지 못하는 도시’라 표현했고, 다른 이는 해망동 골목을 잊혀진 사연들이 눌어붙은 벽’이라 불렀다. 이 도시의 문학은 고요한 절망이자, 절망 속에서도 견딘 사람들의 숨결이다.
4. 기억의 보존, 그리고 다시 쓰는 도시의 이야기
군산 근대문학관은 단순한 과거의 보관소가 아니다. 지금도 이곳에서는 작가 초청 강연, 낭독회, 시민 시 쓰기 프로그램이 열리고 있다. 도시의 과거를 이해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삶을 다시 문장으로 잇는 작업이 지속되는 공간인 것이다. 근대문학관에 모인 사료들은 일제강점기 문학사나 문인들의 발자취로 귀결되지만, 그 너머에는 항상 오늘의 독자들이 있다. 누군가는 이곳에서 낡은 수첩을 보고 글을 쓰고, 누군가는 폐허의 창문을 보며 카메라 셔터 대신 시를 눌러 담는다. 군산이라는 도시는 그렇게 ‘문학적 공간’으로 다시 살아난다. 문학은 여전히, 그리고 끊임없이 도시를 되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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