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화는 숲에 묻히지 않는다. 그건 지금도 누군가의 걸음 속에서 다시 써지고 있다.”
1. 천년의 숲, 전설이 잠든 길을 걷다
울진 금강송 숲길은 단순한 삼림 산책로가 아니었다. 수백 년 전부터 이곳은 사람과 자연, 전설과 신앙이 함께 어우러져 온 살아 있는 신화의 공간이었다. 숲길을 따라 걷다 보면, 길 양옆으로 키 높이 솟은 소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곧게 뻗어 있었고, 그늘 아래로는 천천히 흐르는 바람이 지나가며 조용한 속삭임을 들려주고 있었다.
금강송이라 불리는 이 소나무들은 예로부터 왕실 건축의 최고급 재목으로 쓰였을 만큼 단단하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이 숲에 오래도록 남아 있는 건 목재보다 더 깊은 것이었다.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이 숲을 ‘말하는 숲’이라 불렀다. 바람이 불면 나무들이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듯한 소리를 냈고, 그 속엔 오래된 설화와 이방인의 이야기, 그리고 잊힌 시간의 흔적이 겹겹이 얽혀 있었다.
나는 그날, 숲 초입에서부터 숨을 고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발끝에 밟히는 부드러운 흙과 솔잎 사이로 햇살이 스며들었고, 나무 사이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 마치 누군가의 옛말을 들려주는 듯한 기분을 주었다. 고개를 넘는 길목마다 작은 이정표와 전설이 얽힌 안내문이 세워져 있었고, 걷는 행위 자체가 곧 ‘시간을 거슬러가는 일’처럼 느껴졌다.
울진 금강송 숲길은 단순히 자연 속을 걷는 산책이 아니라, 전설과 나무가 함께 살아 숨 쉬는 이야기의 길이었다. 이곳에서는 어느 방향으로든 시간이 한 겹씩 벗겨지고 있었고, 나는 그 안을 조심스럽게 걸어가고 있었다.
2. 금강송의 품속에서 태어난 옛이야기들
금강송 숲에는 전해 내려오는 설화가 많다. 그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세 그루의 수호송’ 이야기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불에 타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세 그루의 소나무는,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영물로 숭배되었고, 사람의 목숨을 대신한 존재로 여겨졌다. 또 어떤 이는 병든 아버지를 위해 이 숲을 지나며 꺾지 않고 조심스레 나무를 스쳤는데, 돌아와 보니 병이 씻은 듯 나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 이야기들은 기록된 역사가 아닌, 구전으로 살아 있는 설화이며, 자연과 인간이 어떻게 서로를 기억하고 위로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오늘날 그 숲길을 걷는 이들도 나무 한 그루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이유는, 단지 경관 때문만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이야기의 기운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3. 나무와 바람이 빚은 자연 서정시
숲길을 걷는다는 것은, 자연의 언어를 시처럼 읽는 일이다. 금강송 숲은 그 어떤 시보다 더 서정적인 문장을 품고 있다. 줄기의 갈라짐, 가지의 꺾임, 뿌리의 퍼짐은 각각 문장의 운율처럼 이어지고, 바람이 불어 흔들리는 가지는 숨겨진 시구를 암송하는 낭송자 같다. 실제로 많은 시인들이 울진 금강송 숲을 방문한 후 시를 남겼다. 그들은 이 숲을 ‘천년의 시집’이라 부르며, 한 그루의 나무를 ‘묵묵한 시인’이라 칭했다. 숲의 적막함은 비어 있음이 아니라, 말로 다 하지 못한 정서가 가득 찬 상태였다. 자연은 말하지 않지만, 그 침묵은 문장보다 더 명확한 의미로 사람의 가슴에 새겨진다.
4. 오늘을 걷는 이에게 전해지는 오래된 위로
현대의 울진 금강송 숲길은 힐링과 명상의 장소로 주목받고 있다. 하지만 진짜 위로는 산림욕이나 경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이 숲이 가진 시간의 결에서 비롯된다. 오랜 세월을 살아낸 나무들의 존재는, 단지 오래됨이 아닌 견딤의 증거이며, 그 아래를 걷는 우리는 그 오래된 인내의 그림자 안에서 스스로를 비추게 된다. 숲의 조용한 울림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멈춰 서고, 한참을 들여다보며 다시 걸음을 떼게 된다. 마치 삶의 리듬을 조율받는 듯이. 금강송 숲길은 결국 자연과 인간, 과거와 현재, 이야기와 감정이 이어지는 통로이며, 눈에 보이지 않는 문장들이 마음에 적히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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