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도시 문화 탐방기

영덕 블루로드와 파도소리, 지역 설화로 본 문학적 상상력

easy-info1 2025. 7. 27. 14:15

 

1. 파도가 말을 거는 길, 블루로드의 서사

 
경북 영덕에 위치한 블루로드는 단순한 해안 산책로가 아니었다. 이 길은 바다와 사람이 함께 써 내려간 하나의 문학적 서사처럼 느껴졌고, 걷는 동안 나는 바람과 파도, 햇살의 리듬에 따라 마음이 천천히 정돈되는 것을 느꼈다.

 

블루로드는 총 4개의 코스로 구성되어 있었다. A코스는 축산항에서 고래불해수욕장까지 이어지는 바다 마을의 일상을 담은 길이었고, B코스는 창포말등대와 강구항 사이를 따라 걷는 길로, 절벽과 바다가 맞닿는 드라마틱한 풍경이 펼쳐졌다. C코스와 D코스는 각각 푸른 숲과 조용한 어촌 마을을 지나며, 걷는 이에게 다양한 표정을 보여주었다.

 

길을 따라 걷다 보면, 파도는 늘 같은 소리를 내는 듯했지만 이상하게도 날마다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았다. 어느 순간 나는 그 이야기 속에 한 줄을 덧붙이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고, 나의 생각과 감정이 바람에 실려 풍경 속으로 녹아들고 있었다. 길 위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내면 깊숙한 곳에서 새로운 문장이 태어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블루로드는 단지 풍경을 감상하는 산책로가 아니었다. 기억과 상상이 교차하는 감성의 공간이었고, 걷는 행위 자체가 문학적 경험이 되는 길이었다. 그렇게 나는 파도가 말을 걸어오는 그 길 위에서, 한 편의 서사 안을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영덕 블루로드와 파도소리, 지역 설화로 본 문학적 상상력

 

2. 푸른 길 위에 떠도는 지역의 설화

 
이 길에는 오래된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망부석 전설’이다. 한 여인이 바다로 떠난 남편을 기다리다 그 자리에 돌이 되었다는 이야기. 단순한 슬픔의 서사를 넘어서, 이 이야기는 바다를 마주한 삶의 간절함과 기다림의 상징이다. 또 다른 전설로는 ‘용왕과의 약속’ 이야기가 있다. 바다에서 풍랑을 잠재우기 위해 마을 주민이 올린 제물 속에서, 사랑하는 딸이 사라졌다는 비극적 설화는 지금도 해안 절벽 어귀에서 조용히 전해진다. 이런 설화는 단지 옛이야기가 아니라, 문학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원형 텍스트로서 지금도 새로운 글의 재료가 된다.
 

3. 문학과 바다가 만나는 파도의 언어

 
블루로드를 걷다 보면 바다가 끊임없이 말을 거는 것처럼 느껴진다. 소설 속 배경이 되거나 시의 운율로 흘러드는 그 소리는, 인간의 감정과 닮아 있다. 영덕의 시인 정한모는 “파도는 말보다 느리게 말하고, 침묵보다 더 깊게 남는다”라고 했다. 이는 블루로드를 걷는 이들이 어떤 문장을 떠올리지 않고는 지나칠 수 없게 만드는 힘과 닿아 있다. 절벽 아래로 쏟아지는 파도 소리는 고백이 되고, 바다에 지는 해는 이별이 된다. 이 길 위에서는 풍경 자체가 이미 하나의 감정 서사이자 시적인 텍스트다. 바다는 작가이고, 우리는 그 글을 천천히 읽는 독자다.
 

4. 삶과 자연이 교차하는 순간들

 
지역의 설화와 문학적 이미지가 만나면, 그 풍경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다. 블루로드는 현실과 허구, 감정과 역사 사이의 경계 위를 걷는 공간이다. 바다를 따라 걷다보면, 오래전 이 길을 걸었던 어부의 삶이 상상되고, 허구 속 주인공이 그 자리에 앉아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 상상은 자연의 질감 위에 스며들고, 길 위의 표지석 하나, 낡은 등대 하나마저도 서사의 일부로 바뀐다. 걷는 이는 단지 길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 길에 깃든 기억과 목소리를 수집하며 문학적인 감각으로 자연을 재구성하는 셈이다.
 

5. 바다를 기억하는 글쓰기

 
많은 문인들이 이곳을 찾아 글을 남겼다. 단지 풍경을 묘사하는 차원을 넘어서, 바다가 전하는 감정과 그 안에 묻힌 사람들의 이야기를 되살리는 작업이었다. 한 수필가는 이곳을 두고 “파도가 아닌 사람의 삶이 부딪혀 깨지는 소리가 들리는 곳”이라 말했다. 설화는 자연의 울림을 해석한 인간의 상상력이었고, 글쓰기는 그 상상력을 현실로 끌어오는 작업이었다. 영덕 블루로드는 그렇게 지금도 문학적 텍스트로 끊임없이 다시 쓰이는 공간이다. 블루로드를 걷는다는 것은 글로 쓸 이야기를 찾는 일이자, 이미 존재하는 이야기 속으로 자신을 조용히 섞는 일이다.
 

6. 걷는 자가 창조하는 또 다른 이야기

 
블루로드의 진짜 매력은 고정된 서사가 없다는 데 있다. 누구나 자신만의 감정으로 이 길을 걷고, 파도와 바람의 결을 기억 속 이야기로 재해석한다. 즉, 블루로드는 열린 텍스트이자 살아 있는 문학 공간이다. 지역 설화는 출발점일 뿐, 결국 이 길을 걷는 이는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주인공이 된다. 문학은 이처럼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한 걸음 안에 존재하는 상상력의 기록이다. 블루로드는 그 기록의 장이며, 각자의 감정으로 채워지는 백지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