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도시 문화 탐방기

제주 김영갑 갤러리와 고요한 풍경이 만든 시적인 순간

easy-info1 2025. 7. 26. 11:05

1. 제주의 빛과 바람, 김영갑 사진의 근원적 풍경

 
제주를 단순한 여행지로 기억하는 이들에게 김영갑의 사진은 낯설고 생경하게 다가온다. 그의 렌즈에 담긴 제주는 관광 엽서 속 푸른 바다와 화창한 하늘과는 거리가 멀다. 그가 포착한 빛은 쨍하지 않고, 바람은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사진 속에는 정지된 시간과 적막의 감정이 스며 있으며, 그 속엔 제주의 본질을 꿰뚫는 고요한 시선이 자리한다. 김영갑은 1980년대부터 20여 년에 걸쳐 오름과 돌담, 폐허와 안개를 찾아다니며 ‘사람 없는 풍경’을 탐색했다.

 

그는 제주라는 땅의 화려함보다, 그 깊은 내부에 감춰진 침묵의 결을 좇았다. 황량한 밭담과 안개 낀 들판, 무너진 집터와 바람이 머물던 틈. 그 안에서 그는 언어 대신 이미지로 말을 걸었고, 보는 이로 하여금 감정의 결을 따라가게 했다. 풍경이란 단지 눈에 담기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감정의 무늬로 새겨지는 것이라는 믿음은 그의 사진 곳곳에 녹아 있다.

 

김영갑은 말했다. “제주에는 침묵의 언어가 있다.” 그리고 그 침묵은 그의 사진 속에서 가장 큰 목소리로 울린다.

그에게 제주는 풍경이 아니었다. 그것은 매일같이 시가 되는 섬이었고, 그가 남긴 갤러리는 그 시들을 묶은 ‘묵서(黙書)’의 서재이자, 한 사람의 영혼이 정착한 공간이었다.

그의 시선이 머문 자리에는 지금도 여전히 말 없는 언어들이 머물며, 제주라는 섬의 진짜 얼굴을 속삭인다.


 

제주 김영갑 갤러리와 고요한 풍경이 만든 시적인 순간

 

2.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 폐교가 된 시(詩)의 서재

 
김영갑 갤러리는 제주시 성산읍 삼달리의 폐교된 ‘삼달분교’를 개조해 만든 공간이다. 공식 명칭은 ‘갤러리 두모악’으로, 두모악은 한라산의 옛 이름이기도 하다. 이 갤러리는 단순한 사진 전시 공간이 아니다. 이곳은 그가 생전 직접 손으로 벽을 바르고, 서가를 짜고, 조명 하나까지 고민하며 꾸민 ‘사적인 미학의 공간’이다. 무엇보다도 갤러리 내부는 고요하다. 음악도, 설명도, 장황한 안내문도 없다. 대신 벽과 빛, 그리고 사진이 침묵으로 관람객을 이끈다. 마치 낡은 시집을 조용히 펼쳐보듯, 한 장 한 장 사진을 넘기듯 걷게 된다. 김영갑은 폐교를 선택함으로써, 아이들이 사라진 공간에 ‘풍경의 시’를 채워 넣었다. 이 공간은 사진의 갤러리이면서 동시에 사라진 것들에 대한 기억의 재건축이다. 그는 자연이 무너진 곳에서 시를 찾았고, 무너진 건물에서 고요함을 읽어냈다. 갤러리 두모악은 인간의 흔적이 떠난 자리에 자연과 예술이 다시 자라나는 시적 기지다.
 

3. 고요함의 철학, 셔터 대신 침묵을 눌렀던 사진가

 
김영갑은 풍경을 찍는 데 있어서 셔터 소리를 최소화하려 했다. 그는 카메라보다 먼저 공간을 읽었고, 빛이 말할 때까지 기다렸다. “사진은 빛이 허락할 때만 찍는 것이다”라는 그의 말은 단순한 기술론이 아니라 철학에 가깝다. 그는 제주 오름에 올라, 해가 질 때까지 몇 시간이고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어쩌면 셔터를 누르기보다 그 풍경을 오래 바라보는 일이 그의 진짜 작업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찍기’보다 ‘기다림’을, ‘기록’보다 ‘응시’를 택했다. 이러한 태도는 오늘날의 과잉된 촬영 문화와는 극명히 대조된다. 그에게 사진은 ‘삶의 고요함을 붙잡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의 사진에는 큰 사건이나 드라마틱한 장면은 없다. 대신 오름 위에서 바람이 스치는 풀의 흔들림, 바닷가 폐가 위에 걸린 구름 한 조각 같은 사소한 풍경들이 주인공이 된다. 이것이 바로 풍경이 시가 되는 순간이다.
 

4. 사진과 시, 경계 없는 예술의 형식

 
김영갑의 사진은 시와 닮았다. 단정한 구도, 절제된 색감, 말 없는 장면. 마치 윤동주의 시처럼 그의 사진은 낮게 말하며 오래 남는다. 특히 ‘돌담을 지나며’라는 연작에서는 그가 돌담 하나하나를 ‘문장’처럼 배열했음을 알 수 있다. 김영갑은 사진이 예술이 되기 위해선 기술보다 감정의 밀도가 중요하다고 봤다. 그 밀도는 단지 피사체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삶의 태도에서 나온다고 그는 믿었다. 그래서 그의 사진을 보면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그 자리에 오래 머문다. 문학과 사진은 장르가 다르지만, ‘한순간을 붙잡아 남긴다’는 본질은 같다는 점에서 그는 문학적 사진가였다. 그의 사진에는 제목이 없다. 제목 대신 그는 풍경에 고유의 침묵을 남겨두었다. 독자는 그 침묵을 각자의 해석으로 읽어내며, 마치 한 편의 시를 ‘직접 완성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처럼 김영갑의 사진은 감상자가 함께 쓰는 시이며, 그가 남긴 작품은 문장 없는 시집이다.
 

5. 제주에서 다시 마주한 침묵, 김영갑이 남긴 것들

 
김영갑은 루게릭병으로 인해 생의 후반부에는 점점 몸이 움직이지 못했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사진을 찍는 ‘사유의 여행자’였다. 그의 병상 옆에는 여전히 제주 지도와 촬영 메모가 놓여 있었고, 그는 “풍경이 나를 기다려줄 것”이라 믿었다. 그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시선은 여전히 제주 어딘가에 머물러 있다. 김영갑 갤러리를 나설 때, 관람객 대부분은 말이 없다. 그 침묵은 슬픔도, 경외도 아닌, 시의 끝에 맺히는 한 줄의 여운과 닮아 있다. 우리는 이 갤러리에서 사진을 본 것이 아니라, 침묵을 읽은 것이다. 제주라는 땅은 그에게 ‘카메라를 든 시인’으로 살 수 있게 해주었고, 그가 남긴 것은 몇 장의 사진이 아니라 한 지역이 지닌 시적 가능성에 대한 증명이었다. 이제 김영갑은 없다. 하지만 그의 침묵, 그의 기다림, 그의 풍경은 여전히 제주라는 섬 위에서 조용히 시를 쓰고 있다.
 
※ 이 글은 김영갑 작가의 사진 예술과 제주 풍경의 의미를 문화적, 시적인 관점에서 해석한 창작 콘텐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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