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도시 문화 탐방기

구례 지리산에서 만난 작가들, 자연과 함께한 글쓰기

easy-info1 2025. 7. 26. 15:35

 
“지리산은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 깊이 쓰게 된다.”

구례 지리산에서 만난 작가들, 자연과 함께한 글쓰기

 

1. 지리산 자락, 글을 품은 산의 시간성

 

지리산은 단순한 산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풍경이자 철학이며, 시대를 관통한 사유의 심연이다. 한국 근현대사를 통틀어 수많은 예술가와 사상가, 작가들이 이곳을 향했다. 그들은 지리산에서 세상의 소음을 멀리한 채, 자신만의 언어를 가다듬고 삶의 본질을 붙들기 위해 이 산을 찾았다. 특히 전라남도 구례는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문턱이자, 깊은 사유의 골짜기로 불려왔다. 구례의 차분한 풍경과 안개 서린 산자락은, 침묵 속에서 사유하는 이들을 위한 완벽한 안식처였다.

 

지리산이 지닌 힘은 해발 고도나 절경에 있지 않다. 그것은 느림의 시간, 침묵의 감각, 존재를 끌어안는 너그러움에 있다. 작가들은 이 산에서 조급함을 벗고, 문장 속에서 삶을 되짚었다. 빠르게 소비되는 언어가 아닌, 시간의 결을 닮은 문장을 써내려갔다. 여기서 글을 쓴다는 것은 단지 무언가를 기록하는 일이 아니라, 자기 존재와 세계 사이의 거리를 잰다는 의미였다.

 

지리산의 숲과 바람, 맑은 계곡물과 짙은 어둠은 그들에게 단순한 풍경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문장이었고, 하나의 질문이었으며, 사유의 시작이었다. 그래서 지리산은 지금도 여전히 글을 품고 있다. 말을 아끼는 산, 그러나 수많은 작가들의 내면에 문장을 심어준 산. 우리는 지리산을 걸으며, 그들처럼 느리고 깊은 문장을 되새기게 된다.


 

2. 이청준, 지리산의 그림자를 문학으로 바꾸다

 
이청준은 전남 장흥 출신이지만, 구례와 지리산을 배경으로 수차례 글을 썼고 머물렀다. 그의 대표작 「남도사람」에서는 지리산이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인물들의 내면을 반영하는 거울처럼 등장한다. 특히 지리산은 전쟁 이후 상처 입은 개인의 기억과 화해의 공간으로 자주 묘사된다. 이청준에게 지리산은 정치의 상흔이 아니라, 그 상흔을 품은 인간의 내면 풍경이었다. 그는 구례의 작은 절집에 머무르며, 절제된 문장으로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묻곤 했다. 그가 남긴 글 속에서 지리산은 고요한 산이 아니라, 말없이 모든 것을 감내하는 어른의 얼굴처럼 존재한다. 그는 말했다. “산은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많은 것을 말하게 된다.” 지리산에서 그의 문장은 더욱 낮아졌고, 더욱 깊어졌다.
 

3. 김훈, 흙먼지 나는 길에서 써내려간 진실의 문장

 
김훈은 자전거를 타고 전국을 누빈 작가로 유명하지만, 지리산 구례를 자주 언급하며 “문장이 자연을 본받아야 한다”고 말해왔다. 그는 구례읍을 거쳐 연곡사, 피아골을 지나던 어느 늦가을 오후, 노랗게 물든 잎을 보며 “모든 문장은 자기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 적었다. 김훈에게 자연은 낭만이 아니라, 죽음과 해체의 리듬이다. 구례에서 그는 “꽃보다 낙엽이 아름답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낙엽은 자기를 떨구는 결단을 통해 ‘끝남의 미학’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의 글은 이런 자연의 순환 논리를 따르고, 불필요한 수사를 줄이며 진실에 도달하는 길을 걷는다. 구례에서 김훈의 글쓰기는 산과 마주하는 인간의 태도, 다시 말해 ‘본질로 돌아가려는 문장’을 만들어냈다.
 

4. 박남준, 지리산에서 쓴 시는 나무를 닮았다

 
시인 박남준은 구례 지리산을 사랑했던 대표적 인물 중 하나다. 그는 한때 구례에 눌러앉아 집필과 낭송 활동을 이어갔고, 그의 시집 다수는 지리산의 나무, 물소리, 바람결을 시어로 삼는다. 박남준은 말했다. “지리산은 나에게 말을 걸지 않고, 기다릴 뿐이었다.” 그의 시는 외치는 시가 아니라, 머무는 시다. 나무처럼 제자리에 있으면서도, 계절과 함께 변하고 스스로 가지를 늘려가는 구조를 지닌다. 시집 『산에 들다』에서는 “돌도 저마다의 문장을 갖고 있다”고 표현하며, 자연물 하나하나를 살아있는 언어로 간주했다. 구례에서 그는 시를 썼다기보다는 시와 함께 살았다. 그의 글쓰기 방식은 시가 삶이 되는 태도, 즉 시적 존재로 살아가는 법을 보여준다. 그의 문장은 지리산의 나무처럼 천천히, 그러나 뿌리 깊게 독자의 마음에 스며든다.
 

5. 글쓰기는 사라지는 것들을 붙잡는 일

 
지리산은 영원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곳에도 계절은 바뀌고 풍경은 사라진다. 작가들은 그 사라짐의 순간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글로써 붙잡는다. 구례의 한 시인은 “봄이 오는 순간보다, 겨울이 남아 있는 순간을 기록하는 일이 더 어렵다”고 했다. 이는 글쓰기의 본질을 관통하는 말이다. 글은 찰나를 붙잡기 위한 도구이고, 산의 풍경은 그 찰나를 매일 변화시키는 캔버스다. 구례에서 활동한 작가들은 이 찰나를 오래 응시하며, 마침내 언어로 번역했다. 산이 가르쳐준 건 거창한 사상이 아니라, 잊히는 것들의 미세한 감각이다. 지리산의 새벽, 다 타지 못한 장작 불씨, 멀리 울리는 개 짖는 소리. 이런 작은 사라짐을 문장으로 남긴다는 건, 그 자체가 존재의 존중이 된다.
 

6. 지리산에서의 글쓰기, 삶의 태도가 되다

 
구례 지리산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작가들에게 삶의 방식을 제시한 공간이었다. 글쓰기는 이곳에서 기능이 아니라 태도가 되었다. 빠르게 생산하는 콘텐츠가 아닌, 묵묵히 자연과 함께 호흡하며 자라나는 문장. 이는 현대 사회가 잊고 있는 글쓰기의 근원에 대한 회복이다. 구례에서 글을 쓰던 작가들은 하나같이 말한다. “산이 묻는 질문에 대답하는 방식으로 썼다”고. 즉, 작가가 쓰는 것이 아니라, 산이 글을 쓰게 만든다는 태도다. 우리가 지리산에서 배워야 할 것은 자연에 대한 낭만이 아니라, 그 자연을 마주하며 살아내는 일상의 문장력이다. 구례의 산길을 걷다 보면, 문장을 쓰지 않더라도 이미 문장 속에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그곳은 글쓰기 이전의 감각, 다시 말해 침묵으로 시작되는 사유의 장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