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성 탈놀이, 지역 정서의 살아 있는 유산
경남 고성에서 전해 내려오는 탈놀이는 단순한 전통 공연을 넘어, 마을 사람들의 삶과 감정을 담아낸 집단 기억의 형식이었다. ‘고성오광대’라 불리는 이 탈놀이는 조선 후기부터 이어져 내려온 민속 예술로, 오늘날까지도 공연이 지속되고 있는 몇 안 되는 지역 탈놀이 중 하나였다. 현재는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7호로도 지정되어, 문화적 가치가 인정받고 있다.
내가 이 공연을 보러 갔을 때, 넓은 야외무대 위에서 배우들이 하나둘씩 등장하며 극이 시작됐다. 각 등장인물은 과장된 몸짓과 강한 표정으로 관객 앞에 섰고, 그 움직임 하나하나가 단순한 흥미를 넘어서 시대와 삶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특히 양반과 파계승, 하인 등 계층 간 갈등을 풍자하는 장면에서는, 객석에서도 웃음과 함께 묵직한 공감이 흘렀다. 이 탈놀이는 그 시대 민중의 목소리이자, 기록되지 않은 생활사였다.
공연이 진행될수록 나는 점점 극 속으로 빠져들었다. 대사 한 줄 한 줄에는 마을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감정이 녹아 있었고, 그것은 글로 쓰인 문학보다 더 생생하게 다가왔다. 고성오광대는 그래서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하나의 ‘살아 있는 문학’이었고, 지역 정서의 집합체였다.
2. 탈과 이야기의 결합, 몸짓으로 전해지는 문학
고성 탈놀이는 희곡 형식을 따르지 않지만, 그 속엔 뚜렷한 서사와 갈등 구조, 주제 의식이 있다. 탈의 형상은 그 자체로 인물의 성격을 상징하고, 무대는 정형화되지 않았지만 어느 순간에도 드라마를 이루고 있다. 등장인물들은 신분과 계급, 도덕과 욕망을 초월해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보여준다. 이들은 말보다 몸으로 말하고, 표정이 아닌 탈로 감정을 드러낸다. 이 몸짓은 단순한 연극적 표현이 아니라, 문자로 남기지 못한 수많은 지역민의 감정을 대신 기록하는 ‘구술문학’의 한 형태라 볼 수 있다. 말과 글 이전의 문학, 움직임으로 엮인 이야기가 바로 고성 탈놀이다.
3. 풍자와 해학, 고성 탈놀이의 문학적 깊이
고성 탈놀이는 특정한 계층과 권력을 풍자하는 데 탁월하다. 양반의 위선을 비꼬고, 중의 탐욕을 드러내며, 부패한 관료를 조롱한다. 이는 단순한 웃음을 넘어서, 민중이 권력자에게 던지는 가장 날카로운 질문이자 저항의 언어였다. 이러한 구조는 고전 문학에서 흔히 나타나는 ‘희극적 장치’와 일맥상통하며, 구술문학의 틀 안에서 명확한 주제와 메시지를 갖춘다. 고성 탈놀이는 기록되지 않은 역사이며, 지역민이 직접 창조한 날것 그대로의 문학이다. 웃음의 장막 너머에는 현실에 대한 통찰과, 민중의 내면을 꿰뚫는 시선이 숨어 있다.
4. 전통에서 일상으로, 구술문학의 현대적 확장
오늘날 고성 탈놀이는 단지 재현의 대상이 아니라, 현대 지역문화와도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지역 축제나 학교 교육, 공동체 행사에서 이 탈놀이는 ‘과거의 공연’이 아니라 현재의 소통 수단으로 재해석된다. 탈놀이는 현대인에게도 충분히 유효한 메시지를 갖고 있고, 그 안에서 새로운 구술문학의 실천 방식이 태어나고 있다. 예컨대, 청소년들이 참여하는 ‘탈쓰기 체험’은 단순한 공예 수업을 넘어, 자신의 감정과 이야기를 탈에 담는 자발적 문학 활동이 된다. 전통은 멈춰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변형되고 이어지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고성 탈놀이는 오늘날에도 유의미한 ‘현장 문학’이다.
5. 고성 탈놀이, 지역성과 문학성이 만나는 지점
탈놀이는 지역문화의 총합체이며, 동시에 문학의 원형이자 변형이다. 글로 남기지 않아도, 사람들의 입과 몸짓, 표정과 리듬으로 이어져 온 이 전통은 문학의 또 다른 경로를 보여준다. 특히 고성 탈놀이는 지역성과 문학성이 극적으로 교차하는 예다. 지역민들이 직접 대사를 만들고, 극을 구성하고, 연기까지 해내며 만들어낸 이 집단적 창작물은 예술과 삶의 경계를 허물며 문학의 본질을 되묻는다. 여전히 사람들은 이 탈놀이나마 자신들의 정서를 풀고, 웃음을 나누고, 속마음을 표현한다. 고성 탈놀이는 지역의 정신이자, 문학이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드는 방식을 가르쳐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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