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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아리랑 문학관, 민속과 문학이 공존하는 공간

1. 고향 소리의 중심, 아리랑 문학관의 공간성 밀양 아리랑 문학관은 단순한 전시 공간을 넘어, 지역 정체성과 예술이 공존하는 복합 문화 공간이었다. 입구를 지나면 가장 먼저 ‘아리랑의 탄생과 확산’을 주제로 한 전시관이 눈에 들어왔고, 이곳에서는 밀양 아리랑의 역사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불리는 아리랑의 변주를 영상과 음향으로 체험할 수 있게 구성돼 있었다. 전시관 내부는 ‘여백의 미’를 강조한 구조였다. 전시실 사이에는 작은 쉼터들이 놓여 있었고, 조용한 조명 아래 관람객들이 자연스럽게 앉아 쉬거나 사색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특히 벽면에는 “노래는 곧 고향이다” 같은 시적인 문장이 새겨져 있어 관람 흐름 속에 감성을 덧입히는 장치로 작용했다. 해당 문구가 쓰인 공간은 사진 명소로도 유명했다...

강진 영랑생가 문학제, 시인의 고향에서 피어난 문장들

“문장은 고향에서 태어나 삶으로 자란다.” 1. 고향의 뿌리, 강진 영랑생가에서 문학이 시작되다 강진에 위치한 영랑생가는 단순한 고택이 아니었다. 김영랑 시인이 태어나고 유년 시절을 보낸 이 집은, 그의 시어와 정서가 오롯이 스며 있는 살아 있는 문학 공간이었다. 낮은 담장과 초록 기와지붕, 그리고 마당을 감싸는 꽃나무들은 시인의 감수성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었고, 조용한 골목 안 그 풍경만으로도 시 한 줄이 떠오를 만큼 운치가 깊었다. 이곳에서는 매년 ‘영랑생가 문학제’가 열린다. 내가 찾았던 날은 축제의 첫날이었고, 생가 마당 한가운데에는 작은 시화전이 마련돼 있었다. 고운 한지에 적힌 시들이 바람에 살짝살짝 흔들릴 때마다, 김영랑의 시 속 언어가 다시 호흡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지역 주민들과 방..

인제 인문학 캠프 참여기: 작가들과의 소도시 대화

1. 인제, 인문학을 품은 자연의 도시강원도 인제는 설악산 자락 아래 자리한, 산과 물의 기운이 가득한 고장이었다. 투명한 내린천이 마을을 가로지르고, 저녁이면 바람이 언어처럼 귓가에 스며들었다. 사람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이 도시는, 그 자체로 하나의 수필처럼 느껴졌다. 그런 인제에서 작가들과 독자들이 함께 모여 인문학 캠프를 열었다. 이 캠프는 화려한 무대나 복잡한 프로그램이 없었다. 대신, 소도시의 조용한 공간 안에서 자연과 사람, 글과 사유가 천천히 마주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참가자들은 지정된 장소에 모여 서로의 글을 낭독했고, 인근 숲길을 함께 걸으며 나무와 강을 바라보며 대화를 나눴다. 글을 쓰는 사람들은 도시의 소음 대신, 인제의 고요함 속에서 문장을 다시 써내려갈 수 있었고, 독..

카테고리 없음 2025.08.03

고성 탈놀이와 지역 구술문학의 의미

1. 고성 탈놀이, 지역 정서의 살아 있는 유산 경남 고성에서 전해 내려오는 탈놀이는 단순한 전통 공연을 넘어, 마을 사람들의 삶과 감정을 담아낸 집단 기억의 형식이었다. ‘고성오광대’라 불리는 이 탈놀이는 조선 후기부터 이어져 내려온 민속 예술로, 오늘날까지도 공연이 지속되고 있는 몇 안 되는 지역 탈놀이 중 하나였다. 현재는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7호로도 지정되어, 문화적 가치가 인정받고 있다. 내가 이 공연을 보러 갔을 때, 넓은 야외무대 위에서 배우들이 하나둘씩 등장하며 극이 시작됐다. 각 등장인물은 과장된 몸짓과 강한 표정으로 관객 앞에 섰고, 그 움직임 하나하나가 단순한 흥미를 넘어서 시대와 삶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특히 양반과 파계승, 하인 등 계층 간 갈등을 풍자하는 장면에서는, 객석에서도..

보성 문학축제, 차향과 시향이 만나는 순간

1. 차밭 위에 피어난 문학, 보성만의 감성 축제 보성은 오랫동안 ‘차의 고장’으로 불려왔다. 계단처럼 이어진 녹차밭은 사계절마다 서로 다른 색감과 향기를 뿜어냈고, 그 안에서 문학이 피어나는 순간은 해마다 축제처럼 돌아왔다. 내가 보성 문학축제를 찾았던 날도, 햇살 아래 반짝이는 차잎 사이로 시 낭송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보성 문학축제는 단순한 지역 행사가 아니었다. 차문화와 시문학이 함께 숨 쉬는 국내 유일의 감성형 문학축제로, 이곳에서는 차를 마시며 시를 쓰고, 시를 읽으며 자연을 감상하는 순간들이 이어졌다. 초청된 시인과의 대화 시간에는 참가자들이 직접 질문을 던지고 짧은 시를 함께 낭독했으며, 일부는 즉석에서 시를 써보는 체험에도 참여했다.특히 인상 깊었던 건, 축제장 한편에 마련된 ‘차밭 낭독..

남해 다랭이마을, 삶의 고단함을 시로 풀어낸 공간

1. 절벽 끝에 쌓아 올린 삶의 문장 남해 다랭이마을은 산과 바다 사이, 가파른 절벽 위에 사람의 손으로 하나하나 쌓아 올린 독특한 마을이었다. 이곳은 평지를 허락받지 못한 이들이 선택한 삶의 자리였고, 그들은 산비탈을 깎아내고 돌을 쌓아가며 터전을 일구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논과 밭이 마치 계단처럼 층층이 이어져 있는 모습이 펼쳐졌다. 마을을 걸어보니 평평한 길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비틀린 골목, 좁은 돌계단, 굽이진 밭둑길이 이어져 있었고, 그 안에 사람이 자연과 타협하며 살아온 방식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논 하나하나에는 단순한 경작 이상의 의미가 있었고, 삶의 무게를 버티고 일어선 사람들의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이곳의 풍경은 단지 ‘아름답다’는 말로는 설명되지 않았다. ..

거창 수승대와 옛 선비들의 문풍 이야기

1. 바위에 새긴 정신, 수승대의 유래와 의미 경남 거창군 위천면에 자리한 수승대는 단순한 경승지가 아니었다. 이름 그대로 ‘스승을 받든다’는 뜻을 지닌 이곳은, 조선의 선비 정신을 형상화한 상징적 공간으로 남아 있었다. 푸른 계곡과 거대한 바위, 그리고 절제된 형태의 정자가 어우러진 풍경은 보기에는 고요했지만, 그 안에는 깊은 정신이 흐르고 있었다. 수승대는 조선 중기 유학자 남명 조식 선생이 제자들과 함께 머무르며 학문을 나누고 수양을 실천하던 장소였다. 그는 자연 속에서 삶의 본질을 성찰했고, 말보다 행동으로 실천하는 유학을 강조했다. 훗날 그의 학문적 태도와 가르침을 기리기 위해, 이곳은 ‘스승을 받든다’는 뜻의 수승대로 불리게 되었다. 직접 수승대를 찾았을 때, 바위 위에 세워진 정자는 계곡을 ..

고창 선운사와 도솔암, 전설과 불교시의 만남

1. 선운사의 기도 소리, 전설을 품은 절집 전북 고창에 위치한 선운사는 단순한 불교 사찰이 아니었다. 절에 들어서는 순간, 깊은 산사의 고요함 속에서 오랜 시간이 겹겹이 쌓여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이곳이 그저 기와와 돌로 지어진 건물이 아님을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선운사는 천 년 넘는 시간 동안 수많은 수행자와 참배객들의 기도를 품어온 사찰이었다. 마당의 돌바닥은 수없이 오간 발걸음의 무게를 기억하고 있었고, 대웅전 뒤편으로 흐르는 작은 시내 소리까지도 수행의 시간과 맞물려 흐르고 있는 듯했다. 그 속에서 전해지는 가장 유명한 이야기가 바로 백제 무왕과 선운사의 인연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무왕은 젊은 시절 방황하던 중 이곳 선운사에서 수행 중이던 한 고승을 만나 마음을 돌리게 되었고, 훗..

영덕 블루로드와 파도소리, 지역 설화로 본 문학적 상상력

1. 파도가 말을 거는 길, 블루로드의 서사 경북 영덕에 위치한 블루로드는 단순한 해안 산책로가 아니었다. 이 길은 바다와 사람이 함께 써 내려간 하나의 문학적 서사처럼 느껴졌고, 걷는 동안 나는 바람과 파도, 햇살의 리듬에 따라 마음이 천천히 정돈되는 것을 느꼈다. 블루로드는 총 4개의 코스로 구성되어 있었다. A코스는 축산항에서 고래불해수욕장까지 이어지는 바다 마을의 일상을 담은 길이었고, B코스는 창포말등대와 강구항 사이를 따라 걷는 길로, 절벽과 바다가 맞닿는 드라마틱한 풍경이 펼쳐졌다. C코스와 D코스는 각각 푸른 숲과 조용한 어촌 마을을 지나며, 걷는 이에게 다양한 표정을 보여주었다. 길을 따라 걷다 보면, 파도는 늘 같은 소리를 내는 듯했지만 이상하게도 날마다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았..

울진 금강송 숲길에서 전해지는 설화와 자연서정시

“설화는 숲에 묻히지 않는다. 그건 지금도 누군가의 걸음 속에서 다시 써지고 있다.” 1. 천년의 숲, 전설이 잠든 길을 걷다 울진 금강송 숲길은 단순한 삼림 산책로가 아니었다. 수백 년 전부터 이곳은 사람과 자연, 전설과 신앙이 함께 어우러져 온 살아 있는 신화의 공간이었다. 숲길을 따라 걷다 보면, 길 양옆으로 키 높이 솟은 소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곧게 뻗어 있었고, 그늘 아래로는 천천히 흐르는 바람이 지나가며 조용한 속삭임을 들려주고 있었다. 금강송이라 불리는 이 소나무들은 예로부터 왕실 건축의 최고급 재목으로 쓰였을 만큼 단단하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이 숲에 오래도록 남아 있는 건 목재보다 더 깊은 것이었다.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이 숲을 ‘말하는 숲’이라 불렀다. 바람이 불면 나무들이 서로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