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26 9

군산 근대문학관, 항구 도시의 기억을 품은 글들

“기억은 낡지 않는다, 글로 다시 살아나기 전까지는.” 1. 항구의 얼굴, 기억이 머무는 장소 군산 근대문학관에 들어섰을 때, 나는 단순히 문학작품이나 작가의 흔적을 마주한 것이 아니었다. 이 공간에는 군산이라는 도시가 품어온 항구의 정서, 그리고 시대의 단면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낡은 건물의 외벽, 서늘한 내부의 공기, 한 장씩 넘겨진 시집들 사이로 도시의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항구는 언제나 배와 사람, 이야기의 집결지였다. 군산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곡물 수탈의 통로로, 해방 이후에는 고단한 삶과 엇갈린 희망의 무대로 기능했던 이 도시는, 무명의 문학인들에게 있어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현실의 출구였다. 그들은 군산의 골목과 부두, 기차역과 선술집을 무대로 시와 소설을 써..

부여 궁남지, 백제와 시가 어우러진 고요한 공간

“기억이 잠든 물 위에, 감정이 천천히 피어오른다.” 1. 궁남지, 백제의 호수에 비친 정서의 흔적 충남 부여에 위치한 궁남지는 단순한 연못이 아니었다. 이곳은 백제 무왕의 별궁이 있었던 장소로, 고대 왕국의 감성과 철학이 고요하게 배어 있는 공간이었다. 이름 그대로 ‘궁의 남쪽에 있는 연못’이라는 뜻을 지닌 궁남지는 삼국시대 당시에도 특별한 상징성을 가진 인공 정원이었다. 연못 한가운데에는 작은 섬이 있고, 그 위로 이어진 나무다리가 연꽃 사이를 가로질렀다. 물 위로 떠 있는 연꽃들은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고요한 울림을 만들었고, 그 모습은 백제인의 미감과 철학이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듯한 풍경을 만들어냈다. 이곳에서 물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마음을 비추는 거울’처럼 작용했고, 정원과 수로의 ..

문경 새재 옛길, 옛 선비들의 문화여행을 따라 걷다

1. 문경 새재, 선비 유람의 첫걸음 문경 새재는 조선시대 선비들이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한양으로 향하던 길목이자, 유람의 출발점이었다. 이 길은 단순히 한양으로 향하는 험난한 고갯길이 아니라, 선비들이 자연과 벗하며 내면을 가다듬는 사색의 통로이기도 했다. 벼슬길이라는 인생의 전환점을 앞둔 그들은, 문경 새재의 고요한 숲길을 걸으며 마음을 다잡고, 스스로의 뜻을 다시 새겼다. 길가에 흐드러지게 핀 산벚꽃과 굽이진 고갯마루에서 불어오는 바람, 졸졸 흐르는 계곡물 소리까지. 이 모든 풍경은 선비들에게 하나의 스승이었고, 자연은 그들에게 말을 거는 동행자였다. 과거를 향한 발걸음은 곧 자신의 내면을 향한 여정이었고, 이 길을 걸으며 선비들은 삶의 무게와 지식의 깊이를 함께 안고 나아갔다. 새재는 단지 이동..

영월 장릉과 김삿갓 문학촌에서 되새긴 방랑의 의미

1. 영월 장릉, 방랑의 시작 앞에 선 침묵의 무게 강원도 영월의 장릉은 조선의 왕, 단종이 잠든 곳이다. 열다섯 나이에 왕이 되었으나, 곧 숙부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유배 끝에 죽음을 맞이한 그는, 권좌보다 먼저 성숙해야 했던 운명의 소년이었다. 그의 무덤을 품은 장릉은 단순한 능역이 아니다. 그것은 한 인간의 절망이 누워 있는 자리이며, 역사의 무게가 침묵으로 쌓여 있는 공간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방랑’이라는 단어를 다시 바라보게 된다. 스스로 선택한 길이 아닌, 권력에 의해 밀려난 존재의 부유. 장릉은 단종이 유배의 길에 던져졌던 그 순간,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아이의 침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그의 발걸음은 거칠었고, 그 끝에는 자유도 희망도 없었다. 그러나 수백 년의 시간이 지나도 장릉은 그..

나주 읍성 안에서 펼쳐지는 근현대 문학의 흔적

1. 나주 읍성, 역사와 문학의 교차로 전라도의 조용한 도시 나주, 그 중심을 에워싼 나주 읍성은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의 삶과 기억을 품어온 성곽이다. 한때는 군사적 방어의 전초였고, 또 한때는 시장과 행정이 뒤섞인 생활의 중심지였으며,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사라진 시간의 결을 간직한 채 조용히 도시를 감싸고 있다. 나주 읍성의 돌 하나, 담장 하나에는 흘러간 세월의 무게와 함께 이 땅에 살아온 이들의 소소한 이야기가 새겨져 있다. 근대의 문턱을 넘으며 이 지역은 시대의 격랑 속에 놓이게 되었고,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의 혼란은 읍성을 중심으로 한 지역사회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그러나 그 격랑 속에서도 문학은 멈추지 않았다. 문학인들은 이 성곽과 골목길, 그리고 그 곁에 살아가는 민중들의 일상에서 시대의 ..

구례 지리산에서 만난 작가들, 자연과 함께한 글쓰기

“지리산은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 깊이 쓰게 된다.” 1. 지리산 자락, 글을 품은 산의 시간성 지리산은 단순한 산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풍경이자 철학이며, 시대를 관통한 사유의 심연이다. 한국 근현대사를 통틀어 수많은 예술가와 사상가, 작가들이 이곳을 향했다. 그들은 지리산에서 세상의 소음을 멀리한 채, 자신만의 언어를 가다듬고 삶의 본질을 붙들기 위해 이 산을 찾았다. 특히 전라남도 구례는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문턱이자, 깊은 사유의 골짜기로 불려왔다. 구례의 차분한 풍경과 안개 서린 산자락은, 침묵 속에서 사유하는 이들을 위한 완벽한 안식처였다. 지리산이 지닌 힘은 해발 고도나 절경에 있지 않다. 그것은 느림의 시간, 침묵의 감각, 존재를 끌어안는 너그러움에 있다. 작가들은 이 산에서 조급함을..

진주 촉석루와 문학의 만남: 의기와 시를 담다

1. 촉석루, 강물 위에 떠 있는 시간의 누각 촉석루는 단순한 누각이 아니다. 경남 진주의 남강 절벽 위에 세워진 이곳은, 수백 년의 세월 동안 수많은 문인과 시인들의 감정을 받아내며, 하나의 문학적 무대가 되어왔다. 남강의 물결은 그 아래를 흐르며, 지나간 시간들을 천천히 감싸 안는다. 물 위에 떠 있는 듯한 촉석루는 과거와 현재, 정서와 기억을 이어주는 다리이자, 시간의 누각이다. 이곳을 찾는 이들은 풍경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 풍경 속에 겹겹이 쌓인 감정의 잔향을 체험하게 된다. 조선 후기의 시인 김종직은 이 누각에서 강물 위에 떨어지는 달빛을 노래했고, 근대의 이은상은 논개의 죽음을 기억하며 혼을 다한 시를 남겼다. 누각 아래로 흐르는 남강의 물줄기는 그 시들의 정서를 실어 나르고, 때로는 ..

제주 김영갑 갤러리와 고요한 풍경이 만든 시적인 순간

1. 제주의 빛과 바람, 김영갑 사진의 근원적 풍경 제주를 단순한 여행지로 기억하는 이들에게 김영갑의 사진은 낯설고 생경하게 다가온다. 그의 렌즈에 담긴 제주는 관광 엽서 속 푸른 바다와 화창한 하늘과는 거리가 멀다. 그가 포착한 빛은 쨍하지 않고, 바람은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사진 속에는 정지된 시간과 적막의 감정이 스며 있으며, 그 속엔 제주의 본질을 꿰뚫는 고요한 시선이 자리한다. 김영갑은 1980년대부터 20여 년에 걸쳐 오름과 돌담, 폐허와 안개를 찾아다니며 ‘사람 없는 풍경’을 탐색했다. 그는 제주라는 땅의 화려함보다, 그 깊은 내부에 감춰진 침묵의 결을 좇았다. 황량한 밭담과 안개 낀 들판, 무너진 집터와 바람이 머물던 틈. 그 안에서 그는 언어 대신 이미지로 말을 걸었고, 보는 이로 하여..

충북 단양, 박목월이 사랑한 풍경과 그의 시 세계

1. 단양의 사계절, 박목월 시의 배경이 된 자연의 시간 충청북도 단양은 단순히 아름다운 관광지가 아니다. 박목월 시인에게 이곳은 언어가 싹트고 감정이 자라는 토양이었다. 그는 단양 일대를 자주 찾았고, 그곳의 사계절을 온몸으로 느끼며 시의 씨앗을 틔웠다. 단양의 풍경은 그의 대표작 ‘나그네’, ‘산도화’, ‘청노루’ 등에 고스란히 녹아 있으며, 그 자연 묘사는 단순한 배경을 넘어서 정서를 일으키는 감각적 촉매제가 되었다. 설악산이나 지리산처럼 압도적인 산세는 없지만, 단양에는 소백산의 너른 품과 남한강의 곡선이 빚어낸 유려한 침묵이 있었다. 박목월은 그 곡선 속에서 시인의 마음을 비춰보았고, 계절마다 달라지는 빛과 바람의 결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다듬었다. 그에게 봄은 ‘피어도 소리 없는 꽃의 시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