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 18

남해 다랭이마을, 삶의 고단함을 시로 풀어낸 공간

1. 절벽 끝에 쌓아 올린 삶의 문장 남해 다랭이마을은 산과 바다 사이, 가파른 절벽 위에 사람의 손으로 하나하나 쌓아 올린 독특한 마을이었다. 이곳은 평지를 허락받지 못한 이들이 선택한 삶의 자리였고, 그들은 산비탈을 깎아내고 돌을 쌓아가며 터전을 일구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논과 밭이 마치 계단처럼 층층이 이어져 있는 모습이 펼쳐졌다. 마을을 걸어보니 평평한 길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비틀린 골목, 좁은 돌계단, 굽이진 밭둑길이 이어져 있었고, 그 안에 사람이 자연과 타협하며 살아온 방식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논 하나하나에는 단순한 경작 이상의 의미가 있었고, 삶의 무게를 버티고 일어선 사람들의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이곳의 풍경은 단지 ‘아름답다’는 말로는 설명되지 않았다. ..

거창 수승대와 옛 선비들의 문풍 이야기

1. 바위에 새긴 정신, 수승대의 유래와 의미 경남 거창군 위천면에 자리한 수승대는 단순한 경승지가 아니었다. 이름 그대로 ‘스승을 받든다’는 뜻을 지닌 이곳은, 조선의 선비 정신을 형상화한 상징적 공간으로 남아 있었다. 푸른 계곡과 거대한 바위, 그리고 절제된 형태의 정자가 어우러진 풍경은 보기에는 고요했지만, 그 안에는 깊은 정신이 흐르고 있었다. 수승대는 조선 중기 유학자 남명 조식 선생이 제자들과 함께 머무르며 학문을 나누고 수양을 실천하던 장소였다. 그는 자연 속에서 삶의 본질을 성찰했고, 말보다 행동으로 실천하는 유학을 강조했다. 훗날 그의 학문적 태도와 가르침을 기리기 위해, 이곳은 ‘스승을 받든다’는 뜻의 수승대로 불리게 되었다. 직접 수승대를 찾았을 때, 바위 위에 세워진 정자는 계곡을 ..

고창 선운사와 도솔암, 전설과 불교시의 만남

1. 선운사의 기도 소리, 전설을 품은 절집 전북 고창에 위치한 선운사는 단순한 불교 사찰이 아니었다. 절에 들어서는 순간, 깊은 산사의 고요함 속에서 오랜 시간이 겹겹이 쌓여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이곳이 그저 기와와 돌로 지어진 건물이 아님을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선운사는 천 년 넘는 시간 동안 수많은 수행자와 참배객들의 기도를 품어온 사찰이었다. 마당의 돌바닥은 수없이 오간 발걸음의 무게를 기억하고 있었고, 대웅전 뒤편으로 흐르는 작은 시내 소리까지도 수행의 시간과 맞물려 흐르고 있는 듯했다. 그 속에서 전해지는 가장 유명한 이야기가 바로 백제 무왕과 선운사의 인연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무왕은 젊은 시절 방황하던 중 이곳 선운사에서 수행 중이던 한 고승을 만나 마음을 돌리게 되었고, 훗..

영덕 블루로드와 파도소리, 지역 설화로 본 문학적 상상력

1. 파도가 말을 거는 길, 블루로드의 서사 경북 영덕에 위치한 블루로드는 단순한 해안 산책로가 아니었다. 이 길은 바다와 사람이 함께 써 내려간 하나의 문학적 서사처럼 느껴졌고, 걷는 동안 나는 바람과 파도, 햇살의 리듬에 따라 마음이 천천히 정돈되는 것을 느꼈다. 블루로드는 총 4개의 코스로 구성되어 있었다. A코스는 축산항에서 고래불해수욕장까지 이어지는 바다 마을의 일상을 담은 길이었고, B코스는 창포말등대와 강구항 사이를 따라 걷는 길로, 절벽과 바다가 맞닿는 드라마틱한 풍경이 펼쳐졌다. C코스와 D코스는 각각 푸른 숲과 조용한 어촌 마을을 지나며, 걷는 이에게 다양한 표정을 보여주었다. 길을 따라 걷다 보면, 파도는 늘 같은 소리를 내는 듯했지만 이상하게도 날마다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았..

울진 금강송 숲길에서 전해지는 설화와 자연서정시

“설화는 숲에 묻히지 않는다. 그건 지금도 누군가의 걸음 속에서 다시 써지고 있다.” 1. 천년의 숲, 전설이 잠든 길을 걷다 울진 금강송 숲길은 단순한 삼림 산책로가 아니었다. 수백 년 전부터 이곳은 사람과 자연, 전설과 신앙이 함께 어우러져 온 살아 있는 신화의 공간이었다. 숲길을 따라 걷다 보면, 길 양옆으로 키 높이 솟은 소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곧게 뻗어 있었고, 그늘 아래로는 천천히 흐르는 바람이 지나가며 조용한 속삭임을 들려주고 있었다. 금강송이라 불리는 이 소나무들은 예로부터 왕실 건축의 최고급 재목으로 쓰였을 만큼 단단하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이 숲에 오래도록 남아 있는 건 목재보다 더 깊은 것이었다.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이 숲을 ‘말하는 숲’이라 불렀다. 바람이 불면 나무들이 서로 이야기..

해남 대흥사, 고요한 사찰에서 만난 선비의 글결

“고요한 절집엔, 말보다 먼저 도착한 문장이 있다.” 1. 남도의 끝자락, 대흥사에 깃든 고요한 울림 전남 해남의 깊은 산자락에 숨듯 자리한 대흥사는 단순한 불교 사찰이 아니었다. 남도의 끝자락, 두륜산 품 안에 안긴 이 절은 오랜 시간 동안 수행자와 문인, 사상가들의 발걸음이 이어진 사색의 공간이었다. 계곡 소리마저 낮게 울리는 그 고요함 속에서, 나는 시간이 머무는 감각을 처음으로 경험했다. 조선 후기, 유교의 형식이 점차 경직되어 갈 무렵, 많은 선비들이 오히려 이 불교 사찰을 찾아 글과 마음을 다시 돌아보았다고 전해진다. 특히 이곳은 소치 허련, 정약용, 초의선사 등 조선 후기의 대표적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이 머물렀던 장소로도 유명하다. 그들은 절 안의 작은 암자에 머무르며, 자연 속에서 사유하고..

군산 근대문학관, 항구 도시의 기억을 품은 글들

“기억은 낡지 않는다, 글로 다시 살아나기 전까지는.” 1. 항구의 얼굴, 기억이 머무는 장소 군산 근대문학관에 들어섰을 때, 나는 단순히 문학작품이나 작가의 흔적을 마주한 것이 아니었다. 이 공간에는 군산이라는 도시가 품어온 항구의 정서, 그리고 시대의 단면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낡은 건물의 외벽, 서늘한 내부의 공기, 한 장씩 넘겨진 시집들 사이로 도시의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항구는 언제나 배와 사람, 이야기의 집결지였다. 군산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곡물 수탈의 통로로, 해방 이후에는 고단한 삶과 엇갈린 희망의 무대로 기능했던 이 도시는, 무명의 문학인들에게 있어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현실의 출구였다. 그들은 군산의 골목과 부두, 기차역과 선술집을 무대로 시와 소설을 써..

부여 궁남지, 백제와 시가 어우러진 고요한 공간

“기억이 잠든 물 위에, 감정이 천천히 피어오른다.” 1. 궁남지, 백제의 호수에 비친 정서의 흔적 충남 부여에 위치한 궁남지는 단순한 연못이 아니었다. 이곳은 백제 무왕의 별궁이 있었던 장소로, 고대 왕국의 감성과 철학이 고요하게 배어 있는 공간이었다. 이름 그대로 ‘궁의 남쪽에 있는 연못’이라는 뜻을 지닌 궁남지는 삼국시대 당시에도 특별한 상징성을 가진 인공 정원이었다. 연못 한가운데에는 작은 섬이 있고, 그 위로 이어진 나무다리가 연꽃 사이를 가로질렀다. 물 위로 떠 있는 연꽃들은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고요한 울림을 만들었고, 그 모습은 백제인의 미감과 철학이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듯한 풍경을 만들어냈다. 이곳에서 물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마음을 비추는 거울’처럼 작용했고, 정원과 수로의 ..

문경 새재 옛길, 옛 선비들의 문화여행을 따라 걷다

1. 문경 새재, 선비 유람의 첫걸음 문경 새재는 조선시대 선비들이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한양으로 향하던 길목이자, 유람의 출발점이었다. 이 길은 단순히 한양으로 향하는 험난한 고갯길이 아니라, 선비들이 자연과 벗하며 내면을 가다듬는 사색의 통로이기도 했다. 벼슬길이라는 인생의 전환점을 앞둔 그들은, 문경 새재의 고요한 숲길을 걸으며 마음을 다잡고, 스스로의 뜻을 다시 새겼다. 길가에 흐드러지게 핀 산벚꽃과 굽이진 고갯마루에서 불어오는 바람, 졸졸 흐르는 계곡물 소리까지. 이 모든 풍경은 선비들에게 하나의 스승이었고, 자연은 그들에게 말을 거는 동행자였다. 과거를 향한 발걸음은 곧 자신의 내면을 향한 여정이었고, 이 길을 걸으며 선비들은 삶의 무게와 지식의 깊이를 함께 안고 나아갔다. 새재는 단지 이동..

영월 장릉과 김삿갓 문학촌에서 되새긴 방랑의 의미

1. 영월 장릉, 방랑의 시작 앞에 선 침묵의 무게 강원도 영월의 장릉은 조선의 왕, 단종이 잠든 곳이다. 열다섯 나이에 왕이 되었으나, 곧 숙부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유배 끝에 죽음을 맞이한 그는, 권좌보다 먼저 성숙해야 했던 운명의 소년이었다. 그의 무덤을 품은 장릉은 단순한 능역이 아니다. 그것은 한 인간의 절망이 누워 있는 자리이며, 역사의 무게가 침묵으로 쌓여 있는 공간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방랑’이라는 단어를 다시 바라보게 된다. 스스로 선택한 길이 아닌, 권력에 의해 밀려난 존재의 부유. 장릉은 단종이 유배의 길에 던져졌던 그 순간,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아이의 침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그의 발걸음은 거칠었고, 그 끝에는 자유도 희망도 없었다. 그러나 수백 년의 시간이 지나도 장릉은 그..